C. S. 루이스: 천국을 상상한 ‘순전한 기독교’주의자

이종태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그의「교의학」에서, 열매를 두고 판단하자면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어 같은 사상가들이 이룬 업적이 역사상 모든 전문적 신학자들이 이룬 업적을 능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칼 바르트의 기념비적인 저서「로마서 강해」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이 어거스틴도 칼빈도 아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도스토예프스키, 이들은 모두 평신도들이었고 본격적인 신학 저술을 남기진 않았지만, 일반 지성사회에 신학담론을 확장시키는 일에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더 큰 업적을 남겼다.


우리가 영국의 문학교수였던 C. S. 루이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지명도로 보자면, 현재의 추이로 보아 그가 저 위대한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반열에 올라갈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영미권에서 루이스의 대중적 인기는 한국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그의 책들은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서점의 진열대 중앙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해마다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미 헐리웃은 그의 결혼과 사별 이야기를 다룬 ‘쉐도우 랜드’라는 영화를 내본 바가 있고, 요즘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그의 아동 판타지 시리즈를 영화로 만들어내고 있다. 루이스는 어거스틴 이래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기독교 작가라는 통계도 나와 있다.

루이스만큼 에큐메니컬한 작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2005월 11월 7일자 타임지는, 영국 성공회의 충실한 신자였던 이 옥스브리지 학자를 즐겨 인용하는 인사들로,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II세, 그리스 정교회의 대표적 대변인인 칼리스토스 웨어 주교, 그리고 복음주의계열 메가처지 목사인 릭 워렌 등을 들고 있다. ‘순전한 기독교’, 즉 모든 교파적 차이를 뛰어넘는 기독교의 핵심 정수를 현대인의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언어로 제시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그를 ‘회의론자들을 위한 사도’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저술들을 범기독교계의 공동 지적 자산이 되게 했다.

‘순전한 기독교’주의자

현재 루이스의 가장 열렬한 팬들은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복음주의자였을까? 영국 복음주의계의 대표적 지도자 J. I. 패커는 루이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루이스의 신학사상이 복음주의의 일반적 신조들과 차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가령, 루이스는 형벌대속설(penal substitution)이나 이신칭의 등을 강조하지 않았고, 성서무오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세례와 중생을 긴밀히 연결시켰고, 연옥 사상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명시적 신앙 없이 죽은 이들에 대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복음주의자들의 수호성인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루이스이지만 루이스는 복음주의자라기보다는 ‘순전한 기독교’주의자였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란 영국 성공회 성직자였던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용어로서, 교파를 초월해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왔던 신앙의 공통분모를 일컫는 말이다. 기독교 변증가로서의 루이스의 업적은 이 ‘순전한 기독교’의 내용을 명료한 이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현대인들의 지성과 영성에 어필하는 언어로 제시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이 ‘순전한 기독교’와 비기독교적 사상들과의 차이가, 기독교내 서로 다른 교파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고 보았다. 2000여년을 유유히 관통해오는 기독교의 ‘근본’(fundamentals)이 있고, 이 영원한 근본은 시대마다 늘 참신한 언어에 담겨 세상에 제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신학적 저술들의 가치는 독창적 내용(‘what')보다는 창조적 표현 형식(’how')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글에는 기독교의 오래된 어휘들과 진부한 개념들을 다시 살아 약동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루이스는 늘 겸손한 자세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그가 ‘비전문가로서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는 「시편사색」에서 그는 ‘공부를 하다가 의심점이 생겼을 경우, 선생님께 그 문제를 여쭈어 보기보다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볼 때 더 잘 해결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말로 자신과 같은 아마추어 신학자가 쓴 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선생님들’ 즉 전문적 신학자들은 우리가 설명을 부탁하는 그 주제 자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학생이 대체 뭘 어려워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다뤄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루이스가 당시의 신학자 ‘선생님들’ 에 대해 늘 깍듯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는 당시 신학계를 풍미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맹렬한 비판자였다. 그는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물탄 기독교’라고 말하며, 심지어 “그들에게 갈 때 당신은 지금 한 마리 양으로서 이리들 틈으로 가는 것임을 기억하라”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특히, 평생을 신화를 읽고 연구해온 학자로서 루이스는 당시의 어떤 성서신학자들이 복음서를 쉽게 ‘신화’ 장르로 구분시키는 것에 대해 그것을 무지의 소산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또 루이스는 신학자의 역할은 성경의 사상을 현대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인데, 요즘 신학자들은 현대의 사상을 성경의 언어로 포장해 제시한다고 일갈할 적도 있다. 루이스는 전투적인 ‘순전한 기독교’주의자였다.

개신교 주류 교단 신학에서 ‘변증’(apologetics)이 주변 자리로 밀려난 것에는 나름의 타당한 신학적 역사적 이유가 있다. 그러나 변증에 무작정 무관심한 것은 어쩌면 지적 소심함이나, 신학적 허영이나, 혹은 더 나쁘게는, 구도자들에 대한 사랑 없음 때문은 아닌지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 작업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할 모든 이들에게 도전과 본보기가 되어준다.

불온한 갈망: 천국을 상상하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시기’, ‘질투’ 같은 말들을 진지한 신학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인 사람이라면, 루이스는 ‘기쁨’, ‘그리움’ 같은 말들을 깊이 있는 신학적 사유의 주제로 만든 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루이스는 독창적인 신학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거의 모든 사상들은 다 교부들을 비롯하여, 보편적(catholic) 교회의 지적 영적 전통에 전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기쁨(Joy)에 대한, 또 그 기쁨에 대한 그리움(Sehnsucht)에 대한 묘사와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그는 그 어떤 기독교 작가보다도 탁월했고 독창적이었다.

루이스는 기쁨에 대해, 천국에 대해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주저들의 말미에는 거의 언제나 ‘천국’에 대한 부분이 등장한다.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도, 그는 ‘장차 다가올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있다. 특히 「고통의 문제」의 ‘천국’ 장과 ‘지옥’ 장은, 도대체 천국이 뭐고 지옥이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라면, 아니 ‘천국의 가구와 지옥의 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꼭 공들여 정독해볼 만한 부분이다.

루이스는 자신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한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다. 변증가로서의 루이스가 명징한 이성적 사유로써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기독교 문학가로서의 루이스는 ‘세례 받은 상상력’(baptized imagination)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천국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준다. 기독교에 입문하고서 만난 ‘예기치 못한 기쁨’에 놀란(surprised by Joy) 그는 천국을 향한 인간의 ‘불멸의 그리움’을 자신의 내적 여정과 인간실존을 이해하게 하는 실마리로 보았고, 더 나아가 복음전도를 위한 일종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내세도피주의자’였는가? 뜻밖의 답변으로 사람들을 놀래게 만들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이는 루이스는 아마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다. 그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피(탈출)에 대해 반대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간수임에 틀림없다.’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고 또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그 삼위일체적 댄스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천국을 죽음 너머 누리는 개인적 행복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천국을 희망하는 것은 실은 자기 건강을 돌보는 일이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저축하는 일 같이 실은 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천국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목적이요 만족이 되는 곳으로서, 천국 소망은 하나님 자신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르는 필연적 결론 같은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천국을 희망하고 누리기 위해선 먼저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욕구’(appetite for God)가, 요즘 말로 하면 ‘영성’이 있어야 한다.

루이스는 인간의 내면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대상이나 경험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깊은 갈망이 있으며, 이 갈망은 그 원천이자 목표인 하나님을 가리켜주는 표지라고 말한다. 세속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현대의 교육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갈망을 인식하지 못하게끔, 무시하게끔 만들어왔으나, 이 갈망을 인식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로 알아보는 것--즉,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신학적 덕들(theological virtues) 중의 하나다.

이러한 갈망, 소망은 결코 도피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읽어보면, 이 세상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었다. 루이스는 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이토록 무기력해진 것은 그들이 내세에 대해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천국도 잃고 이 세상도 잃어버릴 것이다....우리가 우리의 문명만을 주된 관심사로 삼을 때는 우리는 이 문명을 구원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문명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상’은 이 세상 너머의 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갈망을 불온시한다. 왜냐하면 이 갈망이야말로 이 세상을 안으로부터 전복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힘: 이교의 신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다

루이스는 ‘신화’를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여러 방식들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는 묻는다, “다양한 이교 신화들 속에서 발견되는,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며, 그것을 통해 숭배자들의 삶이나 자연의 삶이 새롭게 변화하는, 그런 신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루이스는 그런 신화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고 계시에 대한 희미한 전조(foreshadowing)들이라고 말한다. 이교의 그리스도들(가령 Balder, Osiris)과 그리스도 자신 사이의 차이는 “거짓과 참의 차이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희미한 꿈 내지 전조 사이의 차이다.”

“날마다 일어나는 밤과 낮의 교체, 해마다 일어나는 작물의 죽음과 재생, 그러한 자연 과정들이 일으킨 신화들, 인간 자신도 참으로 살기 위해서는 모종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그 명료하진 않지만 강렬한 느낌, 이런 것들 속에는 하나님이 근원적 진리에 대해 허락하신 유사성이 있다.” (「시편사색」 p. 151)

루이스는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신화가 사실이 된 것”(Myth became Fact)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인류가 그간 꾸어왔던 “좋은 꿈”(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구원이 온다는)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은, 신화가 ‘신화이기를 그치지 않고’(without ceasing to be myth), 사실의 세계 속으로, 실제 역사 속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기초하여 루이스는 우리가 성육신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이렇게 교훈 한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리는 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 동의해야할 뿐 아니라, 다른 신화들을 대하듯 그것을 상상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즉,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실재는 우리의 영적 상상력에 호소하며 우리의 상상력 넘치는 응답을 요구한다. 루이스는 성육신이나 부활 이야기를 사실로서는 의심하지만, “신화로서 거기서 계속해서 양식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그런 이야기를 사실로서는 동의하지만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보다, 영적으로는 더 살아있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기독교를 사실과 신화로서 다 받아들여야 한다. 성육신은 신화와 사실의 장엄한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기독교는] 하늘과 땅의 결혼이다: 완벽한 신화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사실이다. 단순히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순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우리의 놀라움과 기쁨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도덕주의자, 학자, 철학자 뿐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야만인, 아이, 시인들에게도 호소한다.”

길들여진 사자: 디즈니의 아슬란

참 신화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 안의 ‘아이’에게 호소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나니아 연대기」의 두 번째 책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다. 이 책의 중심부에 자리하는 것은 ‘신적 존재의 죽음과 부활’ 모티브다. ‘나니아’의 창조자이자 진정한 왕인 사자 아슬란이 배신자를 위해 대신 돌 바위에서 죽고, 또 그 돌 바위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 겨울만 지속되던 나니아에 봄을 다시 가져온다는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의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이며, 이 이야기가 아이와 (‘어린 아이 같은’) 어른 독자들에게 주는 재미와 감동은 그 ‘신화의 힘’에 기인한다.

그러나 헐리웃과 모들린 칼리지(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했던 당시 재직했던 옥스퍼드 대학)는 아테네와 예루살렘만큼이나 서로 거리가 먼 것 같다. 실제 루이스를 알았던 사람들이 영화 ‘쉐도우 랜드’가 묘사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불만스럽게 여겼듯이, 앤드류 아담슨 감독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 그려주는 사자 아슬란은 원작의 옷장 속으로 들어가 실제 아슬란을 체험했던 이들에게는 적잖은 실망감을 준다. 진짜 아슬란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선한 존재, 루이스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10권의 책 중의 하나로 뽑은「성스러움의 의미」에서 루돌프 오토가 말한 그 ‘두려움과 동시에 매혹을 주는’(the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신비한 존재다. 그러나 디즈니가 창조한 아슬란에서는 그런 초월적인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감독의 한계라기보다는 영상이라는 매체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일 것이다. 루이스는 생존 시에 아슬란의 시각화를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천국에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분을 만났을 그는 자신의 아슬란 역시 그 거룩한 사랑이신 분에 대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상상이었던 것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 깨달음은 곧 그에게 ‘기쁨’이었으리라.

'기독교사상'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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