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정말로 나니아가 있어요?"

“선생님, 정말로 나니아가 있어요?”

정인영




저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고 있습니다. 첫 해엔 한두 권만 읽어 주었는데 나중엔 아예 1년 동안 7권을 다 읽어 주었습니다. 초기엔 미리 읽어보지 못하고 읽어 준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아이들은 더 재미있어하더군요. 선생님이 책을 읽다말고 “얘들아,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냐? 진짜 재밌다.”고 하면서 킥킥대고 있으니 아이들은 웃겼겠죠.

이렇게 하다 보니 벌써 5년 넘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었습니다. 요즘엔 아이들과 함께 읽거든요. (아슬란을 제외한 모든 역할은 나누어 읽습니다. 아슬란은 권위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항상 제가 읽고 어쩌다 한번씩 읽을 기회를 줍니다. ) 저처럼 나니아 연대기를 5번 이상 소리내어 읽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5년 이상 아이들과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며 느낀 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1. 권위

먼저 ‘권위’입니다. 요즘이야 말로 아이들이 권위를 느끼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조선시대처럼 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제시대처럼 모두의 존경을 받는 독립투사가 있거나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 내 삶에 권위로 다가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화 투쟁도 지나갔고 통일은 피부로 와 닿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워하거나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몽둥이를 들어서라도 인간을 만들자’는 부모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훈계가 아이들의 사고를 제한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부모가 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대통령을 ‘명박이’라고 부르는 시대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권위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부재와 연결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보다 크고 대단하고 무서우며 그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늘과 같은 왕도 없고, 햇빛과 같은 아버지도 없고, 별과 같이 모두가 우러르는 인물도 없습니다. 예전처럼 종과 주인의 관계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에 맞는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엔 과학도 일조를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주지 못하면 자연이라도 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하나님을 태양이나, 불, 바다로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가스덩어리이고 우리가 잘 이용해야 할 대상이며 주기에 맞추어 움직일 뿐입니다. 불은 어떤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여 열과 빛을 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불을 어떻게 끌 수 있는지도 다 압니다. 바다 역시 잘 이용해야할 자원이며 인간은 이미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바닥까지 가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지는 하나님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이미지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던 아이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하나님의 대한 오해를 낳기에 아주 적합하며 겉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될 때까지 점검할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아슬란’이라는 사자입니다. 아슬란은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했으며 입김을 불어 넣어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배신자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쳤으며 나니아의 모든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이기 때문에 보고 싶다고 불러 낼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다고 해서 항상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나니아의 비버는 아슬란을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잠시 대화를 들어 보시죠.






비버부인이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죠. 만일 아슬란 님 앞에서 무릎을 덜덜 떨지 않을 수 있다면 아주 용감한 자거나 바보 멍청이거나 둘 중 하나겠죠.”


루시가 물었다.


“그럼 안전하지 않단 소리예요?”


비버 씨가 말했다.


“안전이라고요? 지금 우리 집사람이 한 말 못 들었나요? 누가 안전하다고 했죠? 당연히 안전하지 않아요. 하지만 좋은 분이세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분은 왕이신걸요.”






‘착하면서 동시에 무서운 존재’는 권위의 양면을 얘기해 줍니다. 권위가 있으려면 착하기만 하거나 무섭기만 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착하면 무섭지 않고 무서우면 착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교사들은 착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최대한 이해하고 받아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요즘의 미덕입니다. 무서운 부모와 교사아래서 자란 세대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니 좋게 봐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착한 부모나 교사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혼내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하죠. 또한 요즘 무서운 사람은 다 나쁜 사람입니다. 무서운 부모는 아이를 때리거나, 전혀 용서를 하지 않거나 감히 말붙일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부모입니다. 무서운 교사란 매를 들거나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교사입니다. 또한 사회에서는 조직폭력배나 권력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죠. 어딜봐도 착하면서 무서운 존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슬란은 나니아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착합니다. 엄마가 병에 걸렸고 그게 항상 맘에 걸린 남자아이 앞에서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뉘우치면 누구라도 받아줍니다. 또한 아슬란은 무섭습니다. 하얀마녀를 한입에 끝냈으며 그의 포효소리 한번이면 나니아 전체가 두려움에 떱니다. 나니아 국민에겐 아슬란의 뜻을 따르든지 안 따르든지 두 개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의 뜻을 의심하거나 자의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따르는 자는 구원받지만 따르지 않는 자는 죽습니다.






5년 동안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서 아슬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슬란을 만나고 싶은 사람?’라면 모두 손을 듭니다. ‘얘들아 아슬란은 엄청 두려운 존재라고 했어. 너희를 잡아 먹을수도 있어. 그래도 만나고 싶어?’라고 해도 모두 손을 듭니다. ‘아슬란의 갈기에 파묻혀 얼굴을 비비고 싶은 사람?’하면 손을 들지 않는 아이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남자아이들로서 그 행동이 여자아이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엔 ‘아슬란의 갈기에까지 파묻힐 필요가 있나’했지만 요즘은 바뀌었습니다. 그 품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웃다가 소리지르고 노래도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아슬란은 우리가 쉽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 앞에서 무례한 장난을 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책에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책을 읽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점에선 루이스가 성공한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말을 들어보시죠.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그것을 의무라고 여긴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느껴야 한다면 감정은 굳어 버리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을 교회 창문에 새기거나 주일학교 교리로만 가르치지 말고 상상의 세계로 보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으로 그런 것들이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어른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은 정의롭고 선하시다.’고 말하지만 그 말에 어떤 의미인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저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주형틀은 있지만 부을 쇳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슬란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듯이 우리 아이들은 아슬란의 포효소리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2. 의식






두 번째 ‘의식’입니다. 의식 역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의식이란 나보다 크고, 위대하며, 오래된 것과 접속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성경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피흘리는 제사,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 정체성을 새기는 할례. 이 뿐 아닙니다. 신약에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만찬과 세례의식도 남겨 주셨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의식다운 의식을 경험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성인식도 하지 않고 책례도 하지 않습니다. 졸업식과 입학식은 형식적인 것이 많습니다. 결혼식장은 신혼부부생산공장 같습니다. 마을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도 용돈 많이 받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각종 국경일도 TV에서 하는 기념식을 보지 않는다면 어떤 날인지도 모릅니다. 뭔가 의미를 되새기고, 복장을 갖추고, 마음을 가지런이 하며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일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는 의식이 많이 나옵니다. 나니아의 창조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네 아이는 대관식을 거쳐 왕이 됩니다. 일주일씩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고 모든 임무를 완수한 아이들이 아슬란과 나누는 대화는 의식처럼 치러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책 한권이 끝나면 독서보고서를 쓰게 합니다. 물론 쓴다고 다 통과되는 것은 아닙니다. 쉽지 않습니다. 통과되면 아슬란 도장을 찍어줍니다. 이 도장은 아무 때나 찍어주지 않고 공을 들여 완수한 것에만 찍어줍니다. 의식은 아무나 참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아이들은 학급화폐로 직접 배지를 삽니다. 그냥 줄 줄 알았는데 사라고 하니 ‘안 사요!’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꼬리를 내립니다. 나중에 아슬란 배지를 사려면 7권에 해당하는 배지가 다 있어야 하거든요. 한 권을 다 읽고 독서보고서까지 통과해야 배지를 살 수 있고 이 배지가 있어야 의식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혹 배지를 집에 두고 온 아이는 학급화폐를 내고 대여해야 합니다. 의식은 엄숙하게 치러집니다. 전등을 끄고 커튼을 칩니다. 탁자를 마련하고 식탁보를 깝니다. 초를 켜고 와인잔에 포도주스를 따르고 나니아 옷장문을 통해 입장합니다. 명구를 외우고 잔을 부딪히고 소감문을 발표합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같은 인사말을 주고 받습니다.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눕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선 의식의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제 기억력으로 보자면 거의 확실합니다!) 다만 의식의 분위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공을 들여야 하고, 참여하기 위해선 준비를 해야하고, 말을 아끼고 상대방에 집중해야 하며, 어른으로 대우받았던 흐뭇한 이미지 하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중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이미지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세 번째 과학적 사고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대로 과학은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숭배할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자연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볼 기회도 빼앗겼습니다. 자연을 보며 감탄하지 않습니다. 섭리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지금도 자연에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니아는 동물이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신기해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가 건국될 때는 땅에 동전을 심으면 동전나무가 자라고 사탕을 심으면 사탕나무가 자랐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지만 씨앗을 땅에 심으면 토마토도 되고 사과도 되고 봉숭아도 된다는 것은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작고 검은 것을 심으면 크고 화려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신기해 하지 않습니다.






나니아는 아슬란이 노래로 창조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신기해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얘들아, 나니아는 노래로 창조했대. 그럼 우리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좀 똘똘한 아이들은 빅뱅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빅뱅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데 폭팔이 일어났고 그 폭팔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빛의 속도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이야.”






이렇게 얘기를 해 주어도 아이들은 우리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몇 번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똘똘한 아이들은 그제서야 우리 세계가 더 신기하다고 말을 합니다.






성경의 오병이어 기적이나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기적이 많이 나오냐.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 세계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제대로 보기만 하면 우리 삶에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나니아는 우리세계를 비교하다 보면 우리세계가 얼마나 신기한지 알 수 있습니다.






4. 천국에 대한 그리움






네 번째, 천국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 아이들이 항상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똘똘한 아이들은 그 아이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찹니다.






“야, 그걸 믿냐? 그건 책에서나 나오는 거지.”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책에 나오는 것은 다 실제로 없는 거네?”






“그건 아닌데요. 이건 소설책이잖아요. 다 상상해서 쓴 거라고요.”






“그렇구나. 그럼 두 가지만 질문하자. 첫째, 소설속에 나온 이야기는 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겠네? 둘째, ‘나니아’라는 나라는 없어도 나니아 같은 나라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쯤 되면 진지한 토론이 시작됩니다. 물론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실력이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공정하게 토론이 진행되면 대개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하냐고 물었던 친구에게 혀를 찼던 그 아이는 다음 번에도 코웃음을 치긴 힘듭니다. 게다가 나니아는 소설속의 나라일 뿐이라고 하는 친구도 ‘나니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가고 싶은 사람?’라고 물으면 손을 번쩍 듭니다. 돌탁자에 앉아서 고대글씨를 만져보고 베루아 평원을 달리며 비버의 집에 초대받고 배불뚝이 곰 삼형제의 동굴을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캐어패러벨 성의 네 왕좌에 앉고, 무도회에 참석하며 새벽출정호를 타고 동쪽바다로 나가고 싶어합니다. 무엇보다 마녀의 터키젤리를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제가 얘기해 줍니다.






“얘들아, 옛날의 그 터키젤리는 마법의 터키젤리는 너무 위험해서 구할 수 없어. 대신 지금 나니아의 비버 기념품점에 가면 독성은 없지만 맛은 똑같은 터키젤리를 살 수 있단다. 다음에 내가 나니아에 가면 한번 구해볼게.”






아슬란이 직접 말했습니다.


“내 나라로 통하는 길은 어느 세계에나 있느니라.”






또한 나니아의 탄생을 지켜 보았던 디고리커크 교수님은 피터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피터가 말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선 정말로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여기저기 어디에나, 바로 코앞에도요?”


“암, 있을 수 있고말고.”


교수는 안경을 벗어서 닦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요즘 학교에서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군.”-공립학교 교사로서 작가에게 강하게 불만을 갖고 있는 대목입니다.






어디에서나 나니아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꿈을 꾸죠.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나니아가 존재하고 또 나니아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월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제게 질문을 던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선생님 정말로 나니아에 가 보셨어요? 나니아가 정말로 있어요?”






그러면 전 놀라지도, 귀찮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합니다.






“음.”






그럼 또 묻습니다.






“에이, 거짓말. 그럼 다시 가 봐요. 어디서나 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우리 반 옷장을 통해 가 봐요.”






그럼 전 역시 동일한 말투로 답합니다.






“근데 나니아는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아슬란이 불러야 갈 수 있어. 또 아슬란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자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단다. 디고리의 말 기억안나? 정말이지 나니아에 가려고 절대 애쓰지 말라는 말. 언젠가 너희들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가게 될 거라는 말. 나도 이 말밖에 해줄 수가 없구나.”






방금의 몇 문장을 읽으면서 낯 선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전날의 흥분이나, 처음 듣지만 나를 사로 잡은 음악, 구절 하나 하나가 내 몸에 와서 달라붙는 시, 온 몸을 개운하게 하는 향기를 떠올리신 분이 있다면 역시 나니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우린 천국아닌 것을 사모해 본적이 없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는 아이들 역시 나니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이 제가 나니아 연대기를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느낀 점입니다. 5번을 더 읽으면 어떤 소감이 추가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가의 눈을 가지신 분이 있다면 그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님을 아시겠죠. 오히려 같은 소설을 한국어와 영어로 읽듯이 전혀 다른 글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전혀 다른 표지판이 같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아시겠죠. 그리고 그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될 것입니다.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C. S. 루이스: 천국을 상상한 ‘순전한 기독교’주의자

최근에 발견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2

최근에 발견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