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발견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4
이 편지는 루이스가 마지막으로 입수한 이후로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내용으로 보아 당시와는 얼마의 시간차가 있어 보입니다.
------------------------------------------------------------------
사랑하는 웜우드.
요즘 환자의 동선을 살펴보았느냐? 한편으론 직장에 다니고 또 한편으로는 신학생들을 만나면서 자신은 무식한 평신도나 현학적인 신학생과는 다른, 그야말로 균형 잡힌 인간이 되어간다고 느끼고 있다. 교회동료들을 만날 땐 어려운 신학용어를 섞어가며 조언을 베풀고 신학생들을 만날 땐 그야말로 세속적인 단어를 사용해 난처한 질문을 해대면서 슬슬 자신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야말로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는 거지.
어떻게 균형 잡힌 인간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할 수 있냐고? 웜우드. 생각해 봐라. 환자를 비롯한 요즘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신도들의 무례한 전도나 대규모 집회에 신물이 나긴 했어도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다’라고 외치는 이단적인 기독교인에 합류할 정도로 무식하진 않다. 게다가 어쩌다가 서점 가서 뽑아 든 ‘간추린 교회사’ 같은 책들을 보면, 기독교에 열성적이었던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들이나 수도 없이 생겼다가 사라졌던 이단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더냐. 또한 그 어느 때 보다도 친절-즉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과 비이기주의-즉 개인주의-의 덕목이 추앙받는 이 시대에, 환자처럼 환란과 고통 속에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의 그늘아래 쉬고 있는 인간들은 그 어느 쪽에도 서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진보와 보수의 균형, 이론과 실천의 균형, 전도와 양육의 균형, 말씀과 기도의 균형, 교회생활과 직장생활의 균형. 심지어는 교회 친구와 세상친구의 균형까지 맞추어 가려는 인간들도 있다. 이런 흐름을 끝까지 밀고 가면 ‘신이며 동시에 인간인 예수’도 ‘신과 인간의 완벽한 균형을 이룬 존재’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게다. 이건 성경속의 예수를 천지를 창조한 신으로 받아들이기엔 거북하고 일개 종교창시자로 간주하기엔 왠지 무례하게 느끼는 인간들에겐 그야말로 복음이다, 이 명제를 잘 풀어내기만 하면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와 무속신앙뿐만 아니라 공히 원수가 금하는 동성애, 간음 같은 것들과도 전쟁 없이 모두 한 지붕아래에서 살 수 있지 뭐냐. 이것이야 말로 지난 2000년간의 종교 갈등에 지친 현대의 모든 지성인들이 원하는 일이고 말고. 처음엔 우리들이 이 길로 인도하려고 고군분투했지만 이젠 제 발로 참여하려는 인간이 줄을 섰다.
환자가 균형 잡힌 인간이 되려고 하는 데는 물론 고착화된 교만을 부추길 수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수확은, 신앙의 목적을 ‘균형’으로 삼게 하는데 있다. 그걸 목적으로 삼게만 한다면야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냐.(물론 현 상태에서 말이다.) 환자가 최근에 쫒아 다니는 강독회에서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시작했다는데. 지금이야말로 환자의 친구들을 맡은 동지들과 긴밀하게 협조해서, 주제에 대한 논의의 초점을 ‘균형’을 잡는데 두도록 해야 한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나누기 좋아하는 주제들이 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도록 만들기만 한다면야 뭐가 걱정이냐. 예정이냐 자유의지냐, 복음전파냐 사회봉사냐, 고지냐 미답지냐 같은 문제들을 적당히 논의를 한 후에 ‘조화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 내리게만 한다면 큰 수확이다. 당장은 별 효과가 없어 보여도 장차 원수와의 분리를 꽃 피울 작은 씨 하나를 심어놓는 셈이지.
인간에 대한 원수의 요구의 기본은 조화나 균형이 아니야. 그 작자가 구원을 해나가는 방식만 봐도 모르겠냐. 원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저 논리 속에는, 죽는 것은 죽는 것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일 뿐, 아무리 찾아도 삶과 죽음을 조화시키거나 균형을 잡을 자리는 없다.
원수가 자처한 것은 인간버러지 속에 들어가 새로운 생명의 싹이 되어 주겠다는 게 아니냐. 인간들에게는 그 싹이 자라나도록 토양이 되라는 거고. 그러니까 인간들을 인도하는 건 날마다 새로워지는 역동적 생명이지, A와 B를 모두 만족시킬 연립방정식의 풀이공식이 아니란 말이다.
원수의 예정이냐 인간의 의지냐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야. 이런 문제야 말로 그런 혼란을 일으키기에 아주 좋은 경우지. 인간들은 자신들이 타락한 이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걸 감지해 내는 이성도 타락한 것이라 해야 하는가?’같은 영리한 질문을 던지면서 내심으로는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고 있다...그러다보면 이성의 틀 안에서 어떻게든 예정과 의지를 조화시켜 보려는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냐.
원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정과 의지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세계로 간다는 거야. 더 이상 예정이냐 의지냐 같은 질문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땅인 게지. 그 세계를 지향하며 걸음마를 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당연히 원수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변장을 하는 수밖에 없으니 인간들에겐 그게 균형으로 밖에 비추어 지지 않겠냐.
차던지 덥던지 하라던 원수의 말을 기억하느냐? 물론 요즘엔, 그 말을 곧이곧대로 지켜서 미지근한 물조차 마시지 않는 인간들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섞어 먹는다고 하여 비빔밥을 멀리 하는 인간들은 가끔씩 보이고 있다. 혹시나 그런 인간들이 지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려 다니지 못하도록 각별히 신경쓰고 두 부류가 서로 만나는 일없이 제 구덩이만 열심히 파게 만들도록.
너를 사랑하는 삼촌
screwtape
Comments
Post a Comment